※ 해당 순위는 역대 최고의 자동차 관련 해외 기사 20개에서 정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60. 1957' Maserati 3500GT
3500GT는 대량 생산된 최초의 로드카라는 점에서 Maserati에게 중요한 차였습니다. 1957년, Maserati는 공식적으로 모터 레이싱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GT 도로용 차량 생산에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3500GT의 우아한 차체 형태는 Carrozzeria Touring의 작품이었고, 강관 프레임 -> 튜블러 스틸 프레임에 부착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습니다(Superleggera 특허). 6기통 엔진은 1956년의 350S 레이싱 카의 엔진으로, 낮은 엔진 속도에서 탁월한 토크 출력이 특징이었습니다. 1961년에는 트리플 웨버 카뷰레터가 Lucas사의 기계식 연료 분사 시스템으로 교체되면서 출력이 235hp(3500 GTI)까지 높아졌습니다. ZF사는 4단 기어박스(1960년부터는 5단, 요청 시 3단 자동 기어박스)를 공급했고, 나머지 부품들은 당시 최고의 공급업체들에게서 납품받았습니다. 1959년부터 프런트 디스크 브레이크가 옵션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이 모델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Maserati의 재정난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세라티 공식 사이트에서 발췌
59. 1990' Chevrolet Corvette ZR-1
그동안 콜벳의 주류를 이루던 아메리칸 머슬카 스타일에서 벗어나 유럽 감성이 많이 추가된 4세대 콜벳을 베이스로 GM 산하에 있던 로터스에서 튜닝한 5.7L LT5 엔진을 탑재, 240마력의 기본형에 비해 1.5배 높은 375마력을 뽑아낸다.
베이스인 4세대 콜벳의 경우, 에어로 다이내믹한 디자인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낮은 수치인 공기저항계수 0.34cd를 이루었고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배스터브 프레임, 독특한 방식의 리프 스프링 서스펜션 등 콜벳으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많이 한 모델이지만, 오일 쇼크와 배기가스 규제로 인한 출력 제한으로 콜벳중에선 가장 인기가 없다.
58. 1999' Pagani Zonda
람보르기니 출신의 엔지니어 호라치오 파가니가 람보르기니를 나와 처음 출시한 주문 제작 방식 수제 하이퍼카.
카본 전문가인 호라치오 파가니의 작품답게 많은 부분에 카본 파이퍼가 사용되어 차량의 무게는 1,350kg에 불과했고, 6.0L 450마력의 메르세데스 벤츠 M120 V12 엔진을 탑재하고 0~100km/h까지 4.0초가 걸렸다.
1999년 제네바 모터쇼에 최초로 공개되었고, 총 5대가 제작되어 한 대는 충돌 테스트, 한 대는 전시용으로 쓰여 실제 판매된 차량은 단 3대뿐이다. 당시 완전 수제작이었던 파가니 존다는 1년에 1~2대만 생산이 가능했고, 한 대의 가격은 3억 5천만 원이었다. 4개의 헤드라이트와 후미 중앙의 원안에 묶인 4개의 배기구가 특징이다.
57. 1934' Duesenberg Model J
1926년 어번 오토모빌사의 소유주 에렛 로반 코드는 당시 최고의 고급차 브랜드였던 롤스 로이스에 대항할 만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뒤센 베르크 모토 코퍼레이션을 인수하였고, 1928년 뉴욕 모터쇼에서 Model J를 발표한다.
에렛 로반 코드 소유의 레이싱팀에서 개발한 엔진을 기반으로 6.9L 직렬 8기통 엔진을 탑재, 265마력으로 최고 속도 192km/h에 달했고, 이것은 더 큰 엔진을 장착한 다른 회사의 자동차를 능가하는 성능이었다.
대단한 성능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Model J는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지만, 1930년대 시작된 미국 대공황으로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37년 에렛 로반 코드가 어번 오토모빌을 매각하면서 Model J도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56. 1959' Cadillac Eldorado
엘도라도는 GM 산하의 캐딜락에서 1952년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세상에 공개된 후 2002년까지 50년 동안 12세대에 걸쳐 미국을 상징하는 럭셔리 대형 컨버터블로 자리매김했었다. 그중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 1959년 4세대 엘도라도 비아리츠이다.
30세 젊은 나이에 캐딜락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척 조던은 기존 엘도라도의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배제하고 낮고, 길고, 넓고, 묵직한 디자인의 전면부와 후면부에는 우주선을 떠올리게 되는 거대하고 화려한 테일핀을 넣어 아름답고 색다른 콘셉트의 디자인을 창조해 냈다.
6.4L 345마력 V8 OHV 엔진에 파워 브레이크, 파워 스티어링, 자동 변속기, 2 단 와이퍼, 디스크 브레이크, 화장대 거울, 파워 윈도우, 6 방향 파워 시트, 히터 등 당시로선 고급 장비로 가득하여 그야말로 최첨단 럭셔리 자동차를 대표했다.
55. 1972' Honda Civic
1970년, 막대한 개발비를 쏟아부은 중형 세단 H1300의 실패로 혼다의 경영은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콘셉트의 자동차가 필요했다. 크기와 공간의 효율성, 높은 연비와 공해물질이 적게 배출되는 엔진에 초점을 맞춰 1972년 최초의 시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1973년, 때마침 터진 1차 오일쇼크와 미국의 배기가스 규제에 이미 높은 연비와 공해물질 저감을 콘셉트로 개발된 CVCC엔진을 탑재한 혼다 시빅은 미국 시장에서 엄청난 판매를 올리게 되며, CVCC엔진은 최초의 저공해 엔진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이후 혼다 시빅은 3년 연속 미국 '올해의 차'에 선정되고, 1973년 일본차로서는 최초로 '올해의 유럽차'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다.
혼다 시빅의 디자인 또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후 나오게 되는 폭스바겐 골프, 포드 피에스타, 피아트 리트모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게 되고 197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혼다 시빅의 이러한 성공에도 혼다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는 H1300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1973년 대표직에서 물러나 은퇴하게 된다.
54. 1975' VW Golf(Rabbit) GTI
한국사람에게는 낯익은 디자인의 준중형 해치백, 현대 포니의 디자인을 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했다. 당시에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비슷한 콘셉트의 디자인을 여러 회사에 판매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 초까지 잘 팔리는 차가 비틀밖에 없었던 폭스바겐은 속속 등장하는 성능과 디자인이 좋은 타 브랜드의 자동차들에 밀려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었고, 결국 제작 중이던 50개의 프로토타입 중 단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발을 중단하게 된다.
그 2개의 프로토타입 중 한개가 바로 골프였고, 골프가 살아남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당시 잘 팔리는 디자인을 많이 만들던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디자인이 었기 때문이다. 차체 뒤에 공랭식 엔진을 싣고 뒷바퀴를 굴리던 비틀과 다르게 수랭식 엔진을 차체 앞에 탑재하고 앞바퀴 굴림을 적용한 골프는 비틀보다 실내가 넓고 잘 달렸으며, 해치백이라는 세그먼트를 새롭게 만들면서 1974년 판매가 시작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 해치백 스타일의 자동차는 골프가 최초는 아니다. 1965년 르노16이 최초이지만 골프가 최초의 해치백으로 알려진 것은 해치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골프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골프의 성공 이후 엔지니어들은 고성능 버전의 개발을 원했지만, 1973년 비틀의 고성능 버전을 출시하고 독일 정부와 물의를 빚은 기억이 있는 폭스바겐의 임원진은 골프의 고성능 버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에 폭스바겐의 프레스 부서 책임자 안톤 콘라드와 엔지니어 알폰스 로웬버그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비공식 프로젝트로 고성능 골프 개발을 시작했고, 임원진들은 그들이 폭스바겐 시로코의 다음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개발된 고성능 골프는 Grand Tourer Injection의 약자 GTI라는 이름을 달고 1975년 초 폭스바겐 임원진들에게 그 정체를 드러냈고, 결국 폭스바겐의 임원진들은 골프 GTI의 개발을 공식적으로 승인해 줬다.
3개월 후 독일 푸랑크푸르트 모터쇼에 골프 GTI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그 1년 후 공식적으로 판매가 되기 시작되자 '서민의 포르쉐'라는 별명과 함께 골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며, 1983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총 46만 대가 판매되었다.
53. 1974' Lancia Stratos
이탈리아의 자동차 회사 란치아의 미들쉽 엔진 차량, 란치아의 창업주인 빈센조 란치아는 피아트의 테스트 드라이버 출신으로 레이서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레이서 출신의 창업주 때문인지 란치아라는 브랜드는 랠리 경주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이다. 현재 WRC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제조사도 란치아다.
1960년대 후반 노후된 풀비아로 랠리를 치르고 있던 란치아는 곧 출범할 WRC에서 사용할 새로운 차량의 개발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란치아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유명한 자동차 디자인 회사 베르토네는 이미 람보르기니 쿤타치, 미우라의 디자인으로 유명한 마르첼로 간디니에게 란치아를 위한 새로운 차량의 디자인을 맡겼고, 완성된 디자인과 풀비아의 차체를 이용해 만든 프로토 타입 '스트라토스 제로'를 베르토네 자신이 직접 가지고 란치아의 공장으로 찾아갔다. 이 프로토 타입은 란치아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란치아와 베르토네의 협업은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베르토네와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에 페라리의 2.4L V6엔진을 실은 란치아 스트라토스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WRC 3회 연속 챔피언을 차지한다.
철저하게 랠리를 위해 개발된 스트라토스지만 WRC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일정 대수의 차량을 양산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2년 동안 492대의 양산형 차량이 생산 판매되었다.
52. 1961' Aston Martin DB4 GT Zagato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 마틴 DB5의 이전 모델 DB4 GT를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인 전문 회사인 자가토에서 리빌드 한 차량, 1913년 영국의 고급 수제 스포츠카 회사로 창립한 애스턴 마틴은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생산한 차량을 제대로 판매해 보지도 못하고 매각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여러 차례 재건과 파산을 반복하다가 1958년 런던 모터쇼에서 발표한 3.7L 240마력 직렬 6기통 엔진의 DB4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1959년에 발표된 2인승 좌석에 314마력으로 업그레이드된 GT 버전에 자가토의 디자인을 씌워 DB4 GT Zagato가 탄생하게 되고, 애스턴 마틴의 공식 튜닝업체로 Aston Martin Zagatos가 만들어진다.
DB4 GT Zagato는 원래 총 25대를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수요가 예상보다 많지 않아 20대만 생산되었다.
51. 1948' Jaguar XK120
1945년 SS에서 Jaguar로 사명 변경한 후 처음으로 출시된 2 도어 스포츠카,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DOHC 3.4L 직렬 6기통 엔진은 162마력으로 최고속도 120mi/h(192km/h)를 낼 수 있었고, 이는 XK120보다 몇 배는 비싼 스포츠카들을 뛰어넘는 성능이었다. 엔진의 형식인 'XK'와 최고속도 '120'을 합쳐 'XK120'이라는 이름으로 1948년 런던 모터쇼에 출품됐고,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192km/h는 양산형 자동차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수치였고,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신생 업체나 다름없는 재규어의 기술력을 의심하는 언론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재규어의 창업자 윌리엄 라이온즈는 벨기에의 한 고속도로를 폐쇄하고 기자들 앞에서 XK120의 속도를 시연하게 되고, 재규어의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론 서튼은 XK120을 타고발표했던 수치보다 높은 213km/h를 달성한다. XK120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순간이었다.
이후 XK120은 여러 레이싱에 참가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1949년 잉글랜드 실버스톤 서킷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우승을 시작으로 후속 모델이 나오는 1954년까지 각종 대회를 휩쓸며 전 세계에 영국 스포츠카의 명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49년부터 1954년까지 5년 동안 총 12,000대가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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