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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rs/4 Wheels

역대 최고의 자동차 # 31 to 40

by Uncle.GOM 2020. 6. 4.

40. 1977' Lotus Esprit

에스프리는 영국의 자동차 회사인 로터스에서 유로파의 후속으로 출시한 고성능 GT카이다. 우리에게는 본드카로 더 유명하며, 이제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디자인이다. 1969년 로터스는 영국의 유명한 F1 레이싱 팀 BRM의 엔지니어 토니 러드를 영입했고, 토니러드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로터스의 경영진에게 제시한다. 하나는 2인승 소형 스포츠카였던 엘리트를 4인승 쿠페 스타일의 스포츠카로 재 설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인승 미드쉽 쿠페 스타일 스포츠카였던 유로파의 후속 모델로 2인승의 고성능 GT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주용 차나 소형 스포츠카밖에 만든 적이 없는 로터스로는 모험이었지만 프로젝트는 승인되었고 4년 후 1974년 로터스 엘리트 Type 75가 먼저 대중에 공개된다. 에스프리와 비슷한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인의 4인승 쿠페형 스포츠카로 독창적인 디자인과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Type 75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4기통 차량이었고 F1에서는 유명했지만 대중 차 시장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로터스의 자동차를 비싼 가격에 살 사람은 많지 않았다.

 

Type 75의 흥행은 실패했지만 로터스는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에스프리는 2.0L 162마력의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를 장착한 직렬 4기통 DOHC 엔진에 시트로엥의 5단 수동 변속기를 탑재하고 로터스가 F1에서 습득한 핸들링과 접지력에 관한 기술이 모두 들어가 당시 포르쉐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지게 된다.

 

1975년 에스프리의 프로토타입이 막 완성되고 공개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로터스의 홍보 책임자 돈 맥로린은 에스프리를 홍보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바로 007의 새로운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이었다. 007의 제작진이 새로운 영화에 사용할 차량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당시 가장 유명한 영화 시리즈였던 007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돈 맥로린은 기존 과는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그건 로터스가 제작진을 찾아가서 차량을 홍보하는 게 아닌 제작진이 직접 로터스를 찾아오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돈 맥로린은 에스프리의 프로토 타입 중 한대를 직접 몰고 007의 제작 스튜디오로 찾아가서 스튜디오 앞에 에스프리를 세워 놓고 로터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모든 부분에 테이프를 붙여 가려 버리고 자리를 비웠다. 007의 제작진이 점심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밖에 세워져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에스프리를 보고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돈 맥로린의 계획은 성공했다. 1977년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가 개봉하자 에스프리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사람들이 로터스 에스프리를 사기 위해서는 3년을 대기해야 했다.

 

39. 1968' Toyota Corolla

자동차가 발명되고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가 토요타 코롤라이며, 그 시작을 알린 것이 1966년 출시된 1세대 코롤라 E10이다.

 

1957년 토요타는 북미 시장에 첫 진출을 하게 되며 처음 선보인 차량은 일본 내에서 승용차와 택시로 인기를 얻었던 '토요펫 크라운(toyopet Crown)'이었다. 토요펫이란 1947년부터 토요타의 소형 차량에 붙이던 이름으로 북미 시장에도 그 이름 그대로 진출했지만, 당시 일본인의 네이밍 센스는 미국과는 잘 맞지 않았다. 토요펫 크라운이란 이름은 미국 사람들에게 '장난감'과 '강아지' 그리고 '광대'를 연상시켰고 고가품이던 자동차의 이름으로는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 전후 일본의 비포장 도로에만 초점을 맞춰 개발된 '크라운'은 미국의 잘 다듬어진 고속도로에서 심각한 성능 저하와 내구도를 보여줬으며 차량의 가격도 비쌌다. 북미 진출 이전에 실시한 테스트로 토요타의 경영진은 이미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크라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일본에서의 성공에 취해 있던 탓에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만 것이다. 당연하게도 크라운의 판매는 처참했다. 이후 여러 차례 성능 개선과 다양한 파생 모델을 개발하여 출시하였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1961년 크라운의 수출은 중단되었다. 뼈저린 실패를 교훈 삼아 토요타는 1964년 일본 내에 새롭게 설계한 3세대 '코로나'를 출시하고, 그다음 해인 1965년 새로운 코로나를 가지고 다시 한번 미국 시장을 두드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코로나는 미국 시장에서 2만 대 이상 판매되며 토요타는 8년 전 크라운으로 입은 치욕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다.

 

코로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토요타는 1966년 코로나의 하위 모델로 소형 세단 '코롤라'를 출시하고 1968년부터 미국 시장에 수출을 시작한다. 코롤라는 1.1L 60마력 직렬 4기통 OHV의 낮은 출력의 엔진을 싣고 있었지만 당시 소형차 중에서는 괜찮은 출력이었고 차량의 무게는 710kg밖에 되지 않았다. 60마력의 엔진, 작은 차체, 가벼운 무게가 맞물려 민첩하고 재빠른 핸들링을 보여줬다. 당시 소형차의 대표 모델이었던 폭스바겐 비틀 보다 가격은 저렴하고 성능과 품질은 높았으니 당연히 미국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고 코롤라는 엄청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토요타는 저렴하고 품질 좋은 경제적인 차를 만드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코롤라는 1968년, 한해 전 세계 적으로 24만 대가 팔렸고, 1970년, 1세대가 단종되기 전까지 78만 대가 판매되었다. 그 이후로도 모델 체인지를 계속하며 현재 12세대가 생산되고 있고, 2019년도까지 총 4,650만 대가 판매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1위를 지키고 있다.

 

38. 1948' Land Rover Series 1

현재 고급 SUV를 만드는 회사로 알려진 랜드로버는 1880년대 자전거를 만들던 '스탈리 & 서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83년 세발자전거로 시작한 스탈리 & 서튼은 1885년 당시 페달이 달린 커다란 앞바퀴의 자전거 일색이었던 시장에 현재 우리가 일반적인 자전거라고 알고 있는 마름모 꼴의 프레임에 두 개의 유사한 크기의 바퀴, 뒷바퀴에 체인으로 연결된 페달을 가진 자전거를 세상에 내놓는다. 세계 최초의 현대식 자전거였다. 1890년 스탈리 & 서튼은 자신들이 최초로 출시했던 자전거의 이름 '로버'로 회사의 이름으로 변경하게 되고, 1902년부터 자전거에 작은 엔진을 단 모터사이클과 2인승 소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로버는 군대에 모터사이클을 공급하고 작은 화물차와 구급차등을 만들며 버텨오다가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회사의 성장을 위해 모터사이클 생산을 중단하고 자동차 개발에 전념한다. 새로운 자동차의 개발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1930년에 기차와 자동차가 경주하는 블루 트레인 레이스에서 로버의 경주차가 최초로 기차를 이기면서 영국과 유럽의 귀족들을 고객으로 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지도를 얻게 된다.

 

1935년 새로운 전쟁의 기운을 감지한 영국 정부에 의해, 평상시에는 일반 공장으로 운용되다가 전쟁 발발 시 바로 전쟁용 항공기나 차량을 빠르게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그림자 공장 계획'이 시작되고, 로버는 2개의 그림자 공장을 운영하며 항공기용 엔진과 기체를 제작하게 된다. 여기서 얻은 기술력은 훗날 최초의 가스 터빈 엔진 자동차 '제트1'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45년 전쟁은 끝났지만 로버의 공장은 폭격을 맞아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할 여력은 되지 않았다. 전쟁 전부터 생산해 오던 오래된 모델 '로버 12'를 다시 생산해서 활로를 열어 보려 했지만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고급 스포츠카를 사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때 로버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모리스 윌크스는 아이디어 하나를 제시하게 된다. 모리스 윌크스는 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미국의 '윌리스 지프'를 자신의 농장에서 트럭 대신 사용하고 있었고, 최초의 양산형 4륜 구동 자동차였던 윌리스 지프의 성능에 매료되어 있었다. 전 후 파괴된 도로와 습기가 많아 항상 축축한 영국의 지면 특성에 맞춰 농업을 위한 4륜 구동 자동차를 만들어 판매하면 잘 팔릴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새로운 4륜 구동 자동차에 대한 개발은 시작되었지만, 생산설비도 자금도 부족했던 로버는 기존의 있던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버려진 윌리스 지프의 프레임에 전쟁 전 마지막으로 개발했던 새로운 엔진과 미션, 조향장치를 올렸다. 농업용 차량을 생각했기에 스티어링 휠은 차량의 중앙에 있었고 승객은 운전자의 좌우에 탑승하는 3인승의 형태였다. 전 후라 철이 귀했기에 차체는 항공기 제작에 사용하던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의 합금으로 제작되었고 페인트도 항공기에 쓰던 연녹색 페인트로 도색되었다. 1947년 그렇게 완성된 프로토 타입의 시리즈 1은 다른 차량을 개발할 때까지 임시로 판매할 예정이었지만 예상보다 호응이 좋았고, 로버는 시리즈 1의 정식 판매를 결정하게 된다.

 

1948년 4월,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로버 시리즈 1이 정식으로 공개되었다. 프로토 타입과는 다르게 중앙 핸들이 아닌 일반적인 위치에 있었고 1.6L 51마력 직렬 4기통 낮은 출력의 엔진이었지만 토크는 80lb-ft로 윌리스 지프와 비슷했다. 가장 큰 장점은 450파운드의 낮은 차량 가격과 상업용 차량이기에 가능한 싼 세금, 그리고 부식되지 않는 알루미늄 합금의 차체였다. 모리스 윌크스의 예측대로 농업용 4륜 구동에 대한 수요는 높았고 즉각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이후 10년간 시리즈 1은 20만 대가 전 세계로 팔려 나갔고 1958년 시리즈 2에게 바통을 물려주고 단종된다. 1967년 로버는 레이 랜드 모터스에 합병되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랜드로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며, 1985년 시리즈 3이 단종될 때까지 생산된 랜드로버 시리즈의 60%가 아직까지 도로를 달리고 있다.

 

37. 1966' Ferrari Dino 206 S

페리라의 유일한 V6 라인업인 'Dino'의 경주용 프로토 타입, Dino는 페라리의 창업주 엔초 페라리의 아들 '알프레도 페라리'의 애칭으로 1956년 그가 24살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하기 전 구상했던 65˚ V6 엔진을 장착한 차량은 전부 Dino라는 이름이 붙는다. 1965년 파리 모터쇼에서 디노라는 이름으로 처음 선보였고, 그다음 해 토리노 모터쇼에서 경주용 프로토 타입 디노 206S가 공개됐다.

 

디노 206S는 알파 로메오와 란치아의 전설적인 엔지니어 '비토리오 자노'가 설계했으며, 당시 페라리에서는 보기 힘든 미드쉽 구조로 65도의 기울기를 가지며 F1에서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연소실이 적용된 2.0L 220마력 V6 DOHC 엔진이 관형 세미 모노코크 프레임의 중앙에 장착되어 있었다. 트윈 플레이트 클러치 5단 수동 변속기에 완전 독립식 서스펜션, 강력한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착하여 1966년 세브링 12 레이스에서 5위, 타르고 플로리오 레이스에서 2위, 뉘르부르크링 레이스에서 2위와 3위, 스파 레이스에서 6위를 차지했다.

 

여러 레이스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었던 디노 206S의 기술들은 양산형 모델 206GT와 246GT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된다. 애초에 50대가 생산될 예정이었지만 생산 공장의 문제로 18대만이 생산되었으며, 아름다운 외관과 희귀성으로 현재 약 35억 원을 호가한다.

 

36. 1936' Mercedes-Benz 540K

1928년 메르세데스 벤츠 SSK의 개발 개념을 이어받아 제작된 럭셔리 쿠페 스타일의 자동차, 당시에는 27살의 젊은 디자이너였던 프리드리히 가이거의 초창기 디자인인 중 하나이며, 프리드리히 가이거는 훗날 300SL이라는 최고의 역작을 남기게 된다. 1936년 파리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됐으며, 기본 판매 모델 외에 일부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부분을 구매자의 요구에 맞게 제작할 수 있는 주문 생산이 가능했다. 그 때문에 프레임에 따라 2인승 쿠페 , 4인승 쿠페, 7인승 리무진 등의 모델들이 존재하며 7인승 리무진의 경우 휠베이스만 3,880mm로 당시 가장 큰 자동차 중 하나였다.

 

5.4L 직렬 8기통 엔진은 기본적으로 115마력을 내지만 수동식 슈퍼차저가 달려 있어 슈퍼차저를 작동시키면 180마력까지 올라간다. 선택 가능한 4단과 5단 수동 변속기와 진공 보조 유압 브레이크로 무거운 차체를 안정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특별 주문으로 두꺼운 철판의 장갑판을 사용하는 차체를 주문할 수 있어서 독일의 나치 친위대 장교들의 사랑을 받은 모델이다. 최소 20대 이상의 특별 사양 540K가 나치 친위대에 판매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였던 헤르만 괴링도 장갑판과 방판 유리가 장착된 540K 스페셜을 가지고 있었다. '파란 거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헤르만 괴링의 540K는 1945년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 101 공수 사단에 의해 압수되어 한동안 공수 사단 사령관의 지휘차로 쓰였다.

 

35. 1969' Porsche 917

전 폭스바겐 회장이자 포르쉐의 창업주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주도하에 개발된 포르쉐의 경주용 차량, 이 차량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바로 스티브 맥퀸의 '르망'이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했던 포르쉐는 첫 모델 356을 제재소에서 생산해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0년대가 되어서야 생산 공장을 지을 수 있었고 1960년대가 되어서야 모터 레이싱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역사적인 포르쉐의 간판 모델 911을 출시한다. 이때까지 판매하는 모델이 몇 개 없는 작은 회사였던 포르쉐는 모터 레이싱 경주가 가장 큰 홍보 무대였다. 1968년 국제 자동차 연맹에서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 쉽에 비 양산 출전 차량의 배기량을 3L 이하로 제한하고 25대 이상을 양산하면 배기량 5L 제한에 르망 24 레이스가 포함되어 있는 그룹 4 클래스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규정을 신설하자 포르쉐의 모터 레이싱 부서를 맡고 있던 젊은 천재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이 새로운 규정이 포르쉐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다. 르망 24는 여러 레이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레이스로 포르쉐가 르망 24에서 우승하면 회사는 엄청나게 성장할 거라고 경영진을 설득했지만, 회사의 사활을 건 결정이었기에 포르쉐의 경영진은 결정을 망설였다.

 

1968년 7월, 어렵게 그룹 4 클래스 참가는 결정되었지만 레이스 시작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새로운 엔진을 개발할 시간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레이스에서 쓰고 있던 908 모델의 3L 수평대향 8기통 엔진의 부품으로 917에 사용할 5L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을 만들었다. 908의 알루미늄 관형 프레임을 기본으로 45kg의 가벼운 프레임을 만들고 더 큰 엔진을 넣기 위해 운전석의 위치를 앞으로 이동시켰다. 차체 뒷부분의 커다란 날개는 상황에 따라 긴 버전과 짧은 버전으로 빠르게 교체할 수 있게 설계되었고 차체의 끝에 서스펜션의 운동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에어 플랩을 달았다. 5개월 뒤 프로토 타입이 아직 완성도 안됐지만 기간 안에 25대를 양산해야 했기에 양산형 제작이 시작됐고 포르쉐의 모든 직원이 양산형 제작에 매달렸다. 차체는 플라스틱이었고 아직 개발 안된 부품은 다른 차량 것을 임시로 넣어서 조립된다. 그야말로 판매가 아닌 참가 승인을 받기 위한 25개의 더미를 만들고 있었다.

 

1969년 3월 첫 번째 프로토 타입이 완성된다. 제작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이며, 제네바 모터쇼로 보내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다음 날 917의 첫 공개는 성공적이었고 포르쉐는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69년 4월 말 국제 자동차 연맹의 검사관들은 한 줄로 늘어선 양산형 917 25대를 보게 되고 며칠 뒤, 포르쉐 917은 그룹 4 클래스 출전을 정식으로승인받게 된다. 917의 개발이 시작된 지 불과 10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포르쉐는 고대하던 레이스에 출전하게 되지만 너무 짧은 기간에 개발된 917은 빨랐지만 제어가 되지 않는 괴물이었다. 경주 중 사고로 드라이버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두 대는 고장으로 탈락하게 된다. 917에 모든 것을 건 포르쉐로서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917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드 GT40의 개발을 도왔던 영국인 엔지니어 존 와이어를 고용하고 페르디난트 피에히와 존 와이어는 917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70년, 포르쉐는 개선된 버전 917K로 다시 도전하게 되고, 데이토나 24 레이스 우승을 시작으로 7차전까지 4번 우승을 하고 마지막 8차전 르망 24 레이스에서도 우승을 하며 그 해 종합 우승을 차지한다. 다음 해인 1971년 르망 24 레이스에서는 두 가지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최고 시속 388km/h 기록은 20년간 깨지지 않았고, 두 번째, 총 주행 거리 5,335km 기록은 2010년도에 와서야 아우디에 의해서 깨지게 된다.

 

34. 1967' Alfa Romeo 33 Stradale

20세기 모터 레이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회사 알파 로메오에서 레이싱 카 티포 33을 베이스로 개발한 2인승 미드쉽 스포츠카이다. '33'은 티포 33의 숫자를 따왔고, '스트라달레'는 이탈리아어로 도로라는 뜻으로 레이싱카를 기반으로 한 일반 도로용 버전임을 의미한다. '마세라티 3500 GT', '재규어 XK150', '람보르기니 350 GTV 쿠페' 등 아름답고 수려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프랑코 스칼리오네의 디자인은 이차에서 정점에 달한다. 

 

천장과 팬더, 두 부분에 경첩으로 연결되어 A필러를 따라 움직이듯이 열리는 문은 나비의 날개 같다고 하여 버터플라이 도어라고 불린다. 바로 이 33 스트라달레가 '세계 최초의 버터플라이 도어 자동차'이다. 보닛과 트렁크는 앞 뒤 범퍼를 축으로 열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자동차들과 같은 철판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다. 알루미늄 관형 프레임 섀시에 알루미늄 차체를 씌웠고 운전석의 뒤에는 90˚ 기울기의 2.0L 230마력 V8 DOHC 알루미늄 합금 엔진이 실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넣고도 차량의 무게는 700kg밖에 되지 않아 0-100km/h를 5.5초, 최고 속도는 260km/h 성능을 보였다. 가죽으로 뒤덮인 실내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상당히 호화스러웠고 모든 게 수작업으로 제작되어 완전히 똑같은 33 스트라달레 차량은 없었다. 하지만 가격은 상당히 비싼 17,000 달러로 당시 일반적인 자동차의 평균 가격은 2,800 달러 정도였고 4.0L V12 람보르기니 미우라도 20,000 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당연히 판매는 저조했고 1967년에서 1969년 2년 동안 단 18대만이 생산되었다.

 

33. 1964' Ford Mustang

크라이슬러 회장이었던, 당시 포드의 사업 부문 부사장 겸 총괄 책임자였던 '리 아이코카'는 젊은 소비자 층을 대상으로 한 작고 스포티한 소형차를 계획하게 되고 소형 세단 '팔콘'을 기반으로 포드 머스탱을 개발한다. 소형차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의 기준에서는 중형차 정도의 크기로, 당시 미국 자동차들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길게 나온 후드에는 엔진이 한 개는 더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남아 있었고 트렁크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짧았다. 디자이너 '조 오로스'는 둥글면서 날카로운 유럽 스포츠카들의 느낌을 머스탱에 넣으려고 했고, 완성된 디자인에는 미국 스타일의 각진 커다란 덩어리 안에 유럽 스타일의 부드러운 라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머스탱은 개발 비용을 줄이기 위해 팔콘의 프레임 섀시, 서스펜션, 구동계의 많은 부분을 가져와 개발되었지만 휠베이스는 더 짧게, 트랙은 더 넓게, 그리고 시트를 더 낮게 세팅하여 스포츠성을 강화했다. 엔진도 팔콘에 들어가는 2.8L 105마력 직렬 6기통 엔진과 4.3L 164마력 V8 엔진에 각각 3단 수동 변속기를 얹었고 개발이 시작되고 1년 남짓의 빠른 시점에 첫 프로토 타입이 완성됐다. 개발 초기, 포드가 머스탱에 거는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아서 그저 크기가 작고 적당히 빠르며 가격이 싼, 수요가 많지는 않았던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그 정도의 수준의 차량이었기에 성능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토 타입을 테스트할 때부터 기대 이상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테스트 트랙에는 작고 멋진 머스탱을 구경하기 위해 테스트 드라이버들과 관계자들이 몰려들었고 포드의 엔지니어는 차량이 망가질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1964년 4월 포드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 하얀 컨버터블 머스탱을 처음 공개했고, 작지만 세련되고 멋진, 그리고 가격이 싼 머스탱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머스탱은 낮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판매되었고, 1964년 한 해에만 12만 대를 판매한다. 머스탱의 잠재력을 알게 된 포드는 몇 달 뒤 바로 엔진을 3.3L 120마력 직렬 6기통 엔진, 4.7L 200마력 V8 엔진으로 각각 업그레이드한 모델과 4.7L 210마력 고성능 4배럴 카뷰레이터 V8 엔진, 4.7L 271마력 고성능 4배럴 카뷰레이터 고회전 V8 엔진 모델을 출시한다. 판매량은 점점 치솟았고 1965년 56만 대, 1966년에는 61만 대를 팔아 치웠다. 엄청난 인기 속에 머스탱은 '포니카'라는 새로운 클래스를 만들어 내고, 머스탱 신화를 만들어낸 리 아이코카는 1965년 포드 자동차 부문 부사장, 1967년 포드 총괄 부사장, 1970년에는 포드의 회장이 된다.

 

32. 1984' Ferrari Testarossa

1981년 페라리에서 출시한 12기통 미드쉽 스포츠카 '베를리네타 박서 512i'에는 좁은 운전석과 트렁크 그리고 전방의 라디에이터와 중앙의 엔진 사이에 배관의 열기로 운전석이 점점 더워지는 문제가 있었다. 차체를 재 설계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페라리에서는 베를리네타 박서 512i를 교체할 다음 모델 '테스타로사'의 개발의 서둘렀다.

 

테스타로사는 운전석과 트렁크의 공간 확보를 위해 베를리네타 박서 512i보다 휠베이스와 트랙이 길어졌고 천장도 높아졌다. 엔진은 베를리네타 박서 512i와 동일한 4.9L 12기통 수평대향 엔진이었지만 마력은 50마력 높인 390마력이었고 5단 수동 변속기 위에 얹혔다. 엔진의 실린더 헤드는 빨간색으로 도색되어 있어서 이탈리아어로 '붉은 머리'라는 뜻의 테스타로사와도 어울렸다. 운전석에 열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12기통 엔진의 높은 열을 빠르게 식히기 위해 전면 라디에이터를 과감히 제거하였고, 엔진의 양 측면에 2개의 라디에이터를 설치하고 차체의 측면에 커다란 흡입구를 달았다. 흡입구에는 차체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 것을 금지하는 몇몇 나라의 규정에 맞춰 운전석 도어부터 이어지는 5개의 긴 핀이 붙어 있다. 그 모양 때문에 '치즈 슬라이서'라고 불리기도 하며 테스타로사의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디자인은 알파 로메오와 페라리의 디자인으로 유명했던 피닌 파리나였고, 당시 페라리의 라이벌이었던 람보르기니의 '쿤타치'를 많이 의식하며 테스타로사를 디자인한 듯했다. 테스타로사의 디자인은 간결했던 베를리네타 박서 512i의 디자인과는 다르게 과감하고 화려한 터치가 많이 들어가 있었고 모터 레이스의 노하우가 들어간 공기 역학적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테스타로사의 항력 계수는 쿤타치의 0.42보다 낮은 0.36이어서 리어 스포일러가 필요하지 않았다.

 

완성된 테스타로사는 0-100km/h는 5.8초에 돌파했고 최고 속도는 290km/h였다. 라이벌인 람보르기니 쿤타치 LP500S와 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지는 성능이었지만, 대중들은 테스타로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동차 잡지들은 앞을 다투어 표지에 테스타로사의 사진을 실었고, 사람들은 테스타로사를 구매하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기다리지 못해 정가보다 2~3배 높은 가격에 사는 사람들도 생겼다. 1991년 다음 버전인 512TR이 나올 때까지 총 7,177대의 테스타로사가 판매되었다. 테스타로사보다 10년 먼저 출시되고 1년 먼저 단종된 람보르기니 쿤타치의 총판매 대수는 1,982대였다.

 

31. 1967' Toyota 2000GT

토요타 최초의 고성능 GT 모델이자 영화 '007 두 번 산다'에서 3번째 본드카로 활약했던 차량이 '토요타 2000GT'이다.

 

2000GT는 원래 야마하가 닛산과 같이 개발하던 프로젝트 'A550X'의 프로토 타입이었다. 모터사이클 제조사였던 야마하는 자동차 기술 개발로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 1960년대 초반부터 닛산과 같이 페어레이디, 실비아 등 여러 모델을 개발을 해왔었다. 야마하는 모터사이클 GP 레이싱에서 쌓은 노하우 덕에 엔진 개발에 있어서는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야마하가 개발한 엔진을 실은 닛산의 자동차들도 높은 성능으로 인기가 좋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야마하는 닛산에 GT 스포츠카의 공동 개발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스포츠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보수적인 닛산의 경영진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야마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개발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야마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1년 뒤, 프로토 타입이 완성되고 닛산의 경영진에게 첫 선을 보였지만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했고 급기야 닛산의 경영진과 야마하의 개발 책임자 사이에 큰 논쟁이 오고 가면서 두 회사는 절연 선언을 하고 만다.

 

닛산과는 결별했지만 이미 개발이 거의 완료된 A550X 프로젝트를 그냥 버릴 수 없었던 야마하는 토요타에 프로젝트의 인수를 제안하게 되고 토요타는 흔쾌히 수락하며 2000GT 개발은 시작되었다. 1960년대 당시 작고 싸고 성능이 낮은 자동차만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토요타는 브랜드 이미지 개선을 위해 고급스럽고 스포티한 차량 개발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침 야마하가 설계한 A550X 프로토 타입은 그 조건에 딱 맞았다. 하지만, 원래 닛산을 위해 제작된 프로토 타입의 디자인은 닛산의 느낌이 강했기에 토요타의 디자이너 노자키 사토루의 디자인 중에 하나가 새로운 2000GT의 디자인으로 선택된다. 토요타는 E-Type과 최대한 비슷한 차량을 만들고 싶었고, 노자키 사토루는 2000GT에 E-Type과 같은 공기역학적인 디자인을 넣고 자신만의 개선 사항들을 추가했다. 프런트를 조금 더 짧게 그리고 좁게 다듬었고, E-Type의 문제점 중 하나였던 고속에서 리어가 흔들리는 문제를 없애기 위해 2000GT의 리어는 더 짧게 잘라냈다. 프런트의 높이는 최대한 낮게 하고 미국의 헤드라이트 최소 높이 규정에 맞추기 위해 팝업 헤드라이트를 넣었다.

 

2000GT의 개발이 시작되었을 때 토요타는 재규어 E-Type, 로터스 엘란, 포르쉐 911과 기타 여러 스포츠카를 구입해서 분해하며 연구를 했다. 그중 로터스 엘란의 섀시가 2000GT의 성능이나 주행 성향에 가장 적합하고 판단되었고 로터스 엘란의 섀시를 베이스로 2000GT의 섀시가 개발되었다. 그리고 토요타 크라운 세단의 2.0L 직렬 6기통 엔진을 기반으로 E-Type과 비슷한 느낌의 엔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야마하가 3개의 트윈 배럴 카퓨레이터와 반구형 연소실에 체인 구동 이중 오버 헤드 캠을 올린 DOHC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를 개발하여 적용하였고 5단 수동 변속기가 연결되었다. 일본 차로는 최초로 LSD와 4륜 디스크 브레이크도 표준으로 들어갔다. 성능은 150마력에 0-100km/h는 9.2초, 최고 속도는 217km/h로 일본 내에서는 고성능이었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그리 높은 성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내 인테리어는 훌륭했다. 악기 제작에 오랜 노하우가 있던 야마하의 붉은빛이 도는 '로즈우드'로 만든 목재 핸들과 센터패시아, 그리고 검은색 가죽으로 마감된 실내는 고급 GT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생산은 1967년부터 단종된 1970년까지 3년 동안 단 351대만이 생산되었다. 원래 대량으로 생산할 계획도 없었지만, 너무 비싼 가격도 한몫했다. 2000GT의 일본 출시 가격은 238만 엔으로 당시 토요타 크라운 두 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고, 북미 출시 가격도 6,800달러로 2000GT보다 훨씬 성능이 좋았던 포르쉐 911이나 재규어 E-Type보다 비쌌다. 따지고 보면 351대 판매라는 수치도 성능 대비 너무 비싼 가격에 비하면 많은 판매량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외관에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007 영화에 본드카로 출연했기 때문에 가능한 판매량이었다.

 

1968년 닛산에서는 뒤늦게 A550X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새로운 차량을 개발하고 있었다. 비록 야마하가 거의 다 개발한 프로젝트였지만 공동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이므로 닛산이 그 디자인을 사용하는 데는 문제 될 게 없었다. A550X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개발이 된 닛산의 차량은 미국 지사장 카타야마 유타카의 주도하에 개발이 시작된 바로 그 '닛산 페어레이디 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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